연꽃의 향기속으로 ...
<시흥 관곡지>
관곡지(官谷池)는
조선전기의 명신(名臣)이며 농학자로 이름이 높은 강희맹(姜希孟, 1424~1483) 선생과 인연이 깊은 연못이다.
평소 농학 발전에 대해 깊은 연구와 관심을 기울였던 선생은
세조 9년(1463년)에 중추원부사(中樞院副使)로 진헌부사(進獻副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오게 되었다.
선생이 중국에서 돌아올 때 남경(南京)에 있는 전당지(錢塘池)에서
연꽃씨를 채취해 귀국한 후, 당시 안산군(安山郡) 초산면(草山面) 하중리(下中 里)였던
현 시흥시 하중동의 작은 연못 (위치:관곡지로 93)에 재배를 하게 되었다.
강희맹 선생이 채취해온 전당연(錢塘蓮)은
다른 연꽃과는 달리 꽃의 색이 희고, 꽃잎은 뾰족하며 꽃의 끝부분은 담홍색을 띠는 연꽃이었는데,
이 품종은 이 곳에서 재배에 성공함에 따라 이후 널리 퍼질 수 있었고,
이를 계기로 안산군의 별호(別號)를 세조 12년(1466년)부터 '연성(蓮城)'이라 부르게 되기도 하였다.
이후 관곡지는 수초(水草)가 성하여 황폐해졌는데,
헌종 10년(1844년)에 안산군수로 부임했던 권용정(權用正)이 이듬해 봄 장정들을 동원하여 못을 파내게 하였다.
여름이 되자,
연꽃의 잎이 중국 전당의 것과 같이 두 줄기 자라나게 되었다.
권용정은 당시 경기도 관찰사였던
이계조(李啓朝)에게 서목(書目)을 올려 못을 관리하기 위하여
여섯명의 연지기[連直]을 두도록 청하였는데,
이 서목이 받아들여져 관곡지에는 연지기가 배치되었으며,
혹시 연지기에 결원이 생기면 마을 주민이 이를 대체하도록 하였다.
이들 연지기에는 각종 노역(勞役), 부역(賦役), 포세(布稅), 양곡세(糧穀稅)를 제외시켜주고
오직 못만을 관리하도록 하였고 이로부터 전당연의 종류가 없어지지 않게 되었다.
이러한 내력을 우리가 알 수 있는 이유는
권용정이 관곡지의 유래와 수축 경과, 연지기 배치에 대한 사항을 정리하여
'연지사적 (蓮池事蹟)'과 '연지수치후보초(蓮池修治後報草)'라는 기록으로 남겼기 때문이다.
관곡지는 강희맹 선생의 사위인
사헌부 감찰 권만형(權曼衡)의 가문에서 현재까지 대대로 관리해 오고 있다.
관곡지
2916-0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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