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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대왕의 효심과 부국강병의 원대한 꿈을따라서 ....

 

水原華城

 

 

 

 

水原華城

 

정조는 1789년(정조 13)에 사도세자의 무덤인 영우원(永祐園)을

수백 년간 수원도호부가 있던 화산(花山)으로 옮겨 현륭원(顯隆園)이라 개명(改名)하고

수원 도읍을 새 장소인 지금의 팔달산 아래로 옮기도록 하였다.


그리고 수원부로 부르던

고을 명칭을 화성(華城)으로 고쳐 부르도록 하였다.

이때부터 줄곧 수원은 화성이란 이름으로 사용되었으나

 1895년 지방 관제개편 과정에서

다시 수원군으로 고쳐 부르게 되었고 지금은 수원시로 불리고 있다.


수원부를 옮기고 정조 17년(1793)부터

 화성 축조가 본격적으로 준비되어 이듬해 정월부터 시작해 2년 반 만인 1796년에 완성을 보게 되었다.

성벽 전체 길이는 당초 정약용이 생각했던 4㎞보다 늘어난 5.4㎞ 정도이다.


성곽 시설에서도 적대나 누조, 공심돈, 포루 등과 같이

다른 성곽에서는 볼 수 없는 새로운 시설이 많이 도입되었다.


성벽은 돌로 쌓았으며높이는 지형에 따라 차이가 있으나

 4∼6m 정도이고 성벽 위에는 1m 정도 높이의 여장을 두고 여장에는 총안을 뚫었다.


 성벽은 위로 올라가면서 배가 안으로 들어가는 규형(圭形) 쌓기를 기본으로 했다.

성벽에는 4개의 성문을 두었고 암문 5개를 설치해 통행토록 하였다.

성벽으로 둘러싸인 중앙에는 행궁이 자리 잡았다.


 화성이 위치한 지세는 서쪽에 팔달산이 있고

 그 반대쪽인 동쪽에도 나지막한 구릉이 있으며 이 동서 경사지 사이를

북에서 남으로 개천이 흐르고 그 주위에 약간의 평지가 펼쳐진다.

화성을 비롯해 우리나라 성은 자연지세를 이용해 불규칙한 형태로 쌓아나가는 것이 특징이다.


성문은 동서남북에 4개가 있는데

 북문이 장안문이고 반대 남쪽이 팔달문이다. 동서에 청룡문과 화서문이 있다.

 남북문은 중층문루로서 도성문루에 버금가는 규모와 형태를 갖고 있다.

 

 

 

 

 

장안문(長安門)

장안문은 화성의 북문이자 정문이다.

 보통 성(城)의 남문을 정문으로 삼으나,

 화성은 임금을 가장 먼저 맞이하는 북문인 장안문이 정문이다.


잘 다듬은 화강암으로 쌓은 석축에 홍예문을 냈고

 그 위에 정면 5칸 측면2칸의 다포양식으로 이루어진 중층의 문루가 세워져있다.

또한 가운데에 홍예문이 나있는 벽돌로 쌓은 옹성이 있으며,

양옆에 다른 성벽보다 높이가 약간 높은 두개의 적대를 설치하였다.


 장안문의 이름은

중국의 옛 왕조인 전한(前漢), 수(隋), 당(唐)나라의수도였던장안(현재의 시안시)에서

 따온 것으로 이는 당나라 때의 장안성처럼

화성 또한 융성한 도시가 되라는 정조의 뜻이 담겨 있다

 

 


 

 

 

 

 

 

 

 

 

 

 

 

 

 

 

 

 

 

 

 

 

 

 

 

 

 

 

 

 

 

 

 

 

 

 

 

 

 

 

 

 

 

 

 

 

 

 

 

 

 

 

 

 

 

 

 

 

 

 

 

 

 

 

 

 

동장대(東將臺)

 

성의 동쪽 동북공심돈과 동암문 사이에 위치하고 있다.

 1795년 (정조 19년) 7월 15일에 공사 착수, 8월 10일에 상량, 8월 25일에 장대 건물을 완공하였다.

이 장대의 지형은 높은 곳은 아니지만 사방이 트여 있고,

등성이가 험하게 높이 솟아 있는 곳으로 동쪽 구릉인 선암산(仙巖山)의 요지이자

 성중에서 지휘소를 설치하기에 딱 좋은 장소이다.


 3단으로 쌓은 대가 있고, 3층의 대에서는 총수(銃手)가 숨어서 쏘기에 편리하게 시설되어 있다.

 한가운데 좌우에 와장대(臥長臺)를 설치하고,

 흙을 판판하게 해서 돌로 깔아 하대에서 말을 타면서도 장대에 올라 갈 수 있도록 하였다.

 장대 건물은 정면 5칸, 측면 9칸의 익공식(翼工式) 단층의 팔작기와지붕이다.

건물 주변에는 터를 동서로 80보, 남북으로 240보로 넓이를 잡아 조련장(操鍊場), 일종의 훈련장 같은 것을 닦아 놓았다

 


 

 

 

 

 

 

 

 

 

 

 

 

 

 

 

 

 

 

 

 

 

 

 

 

 

 

 

 

 

 

 

 

 

 

 

 

 

 

 

 

 

 

 

 

 

 

 

 

서장대(西將臺)


화성의 군사지휘본부로서 '화성장대(華城將臺)'라고도 불린다.

 팔달산의 정상에 자리 잡고 있으며

 1794년 (정조 18년) 8월 11일 공사에 착수, 9월 16일에 상량하고, 9월 29일에 완공됐다.

화성장대(華城將臺)라는 편액은 정조가 직접 쓴 것으로 알려져 있다.


서장대에서는 성 전체가 한눈에 들어와,

 화성 일대는 물론 이 산을 둘러싸고 있는 100리 안쪽의 모든 동정을 파악하고,

그 자리에서 군사들을 지휘할 수 있는 위치이다.


이 곳에는 장대석으로 대를 쌓고 세 벌의 계단을 마련하고 그 위에다 또 한 단의 대를 놓고,

또 그 위에다 2층지붕의 건물을 세웠다.

정면 3칸, 측면 3칸의 중층 누각으로서 상층은 정면과 측면이 각각 1칸의 모임지붕으로 되어 있다.

 

 


 

 

 

 

 

 

 

 

 

 

 

 

 

 

 

 

화서문(華西門)


화성의 서문이다.

동남으로 행궁과 460보 떨어졌으며, 홍예와 문루의 제도는 모두 창룡문과 같다.

다만 좌우의 돌 계단을 꺾이게 해서 층을 만들었다.


안쪽 좌우의 무사는 아래 너비가 각각 9척이고,

바깥 쪽은 너비가 각각 22척 2촌이다.

홍예문 사이 좌우의 무사는 높이가 각각 18척이고 수문청은 문의 남쪽 가장자리에 있다.


서옹성의 제도는 동옹성과 같은데 높이는

11척, 안쪽 둘레는 76척 정문에서 36척 떨어져 있으며 바깥 쪽 둘레는 110척이다.

안과 바깥 면 모두에 평평한 여장을 설치하고 외면에는 방안 총혈 19개의 구멍과 활 쏘는 구멍 6개를 뚫었다.

나머지는 모두 동옹성과 같다.

1964년 9월 3일 보물 제 403호로 지정되었다

 

 

 

 

 

 

 

 

 

 

 

 

2016-09-10

水原華城

김상조와 공미영이 눈으로본 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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