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우음도 아시나요?

 

 

“여기가 우음도여!”  

 

 

 

경기 화성시 송산면 고정리 산5

 

 

 

 

 

 

 

 

 

 

우음도(공룡알 화석지)

 

 

여의도 보다 40배 큰 간척지 한 쪽 끝, 우음도에는 과거와 현재가 공존한다.


 간척지 한 가운데를 관통하는 평택시흥간고속도로,

그 옆에 위치한

공룡알화석산지는 수억년 전 우음도가 어떤 모습이었는지 보여준다.

공룡알 화석산지는

 지난 1999년 우연치 않게 사진을 찍으러온 사람들에 의해 발견되었다고한다

이곳 일명 누드바위는 사진작가들이 누드사진을 찍든 바위라고한다.


 현재까지 알둥지만 30개, 공룡알 화석이 300개 넘게 발굴됐다.

특히 여러 퇴적층에서

공룡알이 발견되면서 이곳이 공룡들의 집단 산란지였음이 밝혀졌다.

이에 정부는 공룡알 화석의 가치를 인정해 지난 2000년 이 일대를 천연기념물 414호로 지정했다.


거대한 평원의 한복판을 걷고 있노라면

갈대숲을 배경으로 크고 작은 공룡들이 뛰어다니는 모습이 떠오른다.

 

길의 끝에선 발굴 당시 모습으로 보존돼 있는 공룡알 화석을 직접 볼 수도 있다.

 

바위에 새겨져 있는

둥근 알의 형태가 제법 뚜렷하지만 멋들어진 풍광 때문에 그냥 지나치기 십상이다

 

 

 

 

 

 

 

 

 

 

 

 

[출처] 본 기사는 조선닷컴에서 작성된 기사 입니다

 

화목했던 우음도와 윤수심

윤수심은 목포 여자다. '갯것' 많다는 소문 듣고 한 살 아래 남편이랑 우음도로 왔다.

60년 전이다. 우음도는 지금 경기도 안산과 화성 사이 군자만에 있는 섬이다.

남쪽까지 소문이 퍼질 정도로 우음도 바다는 풍요로웠다.

궁살 앞바다에는 피조개가 널렸다. 구녕물 앞살에는 꽃게와 숭어가 잡혔다.

공새 뒤편 갯벌에는 바지락이 지천이었다.

대나무 막대 하나 들고 바다로 가서 조개를 잡아 부려놓으면 도매상이 트럭에 싣고 도시로 가곤 했다.

실한 물건에 기분이 좋았던 장사치들 덕에 우음도 여자들은 외지 관광도 하곤 했다.

남정네들은 밤새 화투판을 벌여 돈을 잃어도 개의치 않았다. 갯벌에서 담배 한 대 태우며 조개 한 지게 건져내면 그 돈 벌충하고도 남았으니까.

 

마을 앞바다에는 각시당이 있었다. 돌아오지 않는 신랑을 기다리던 각시가 물에 빠져 죽은 암초였다.

3년에 한 번씩 마을 사람들은 굿을 올렸다. 갯벌 옆 나락부리 회나무에서 각시당을 향해 절을 하면 무당이 바위를 향해 초혼을 했다.

마을 안에 있는 회나무와 뒷산 꼭대기에 있는 당집에 제사를 마저 지내고, 사람들은 숲속 군웅당 당집에 모여 하루종일 놀았다.

회나무 아랫집에 이사 왔던 영감은 회나무가 성가시다며 가지를 잘랐다가 며칠 뒤 죽었다.

1979년 11월 1일 각시당 너럭바위 위에 군 초소가 들어섰다.

께름칙했지만 사람들은 참았다. 나라 위한 일이라니까.

 몇 년 사이에 수면 아래 보이지 않는 길로 왕복하며 근무를 서던 군인 여럿이 물에 빠져 죽었다. 초소는 폐쇄됐다.

어느 날 텃밭에 풀이 무성하게 자라기 시작했다.

 

베어도 베어도 끝없이 자라났다.

갯벌에서 바지락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검은 바다에서는 썩은 내가 풍겼다. 윤수심이 말했다

. "내 이름이 수심이니께, 수심 가득 살라는 거였제."

1987년 6월 시화 방조제 물막이 공사가 시작된 것이다. '시화'는 시흥과 화성에서 따온 말이다.

이후 시화호 주변 마을 남정네들은 화투판을 벌이지 않았고, 배를 타지 않았고,

 평생 꼿꼿하게 펴고 살던 허리와 어깨는 순식간에 휘어버렸다

 

 

 

분노한 사내 최종인


그 무렵 서울 살던 최종인이 안산으로 이사를 왔다.

안산은 우음도에서 뭍으로 더 들어가 있다. 최종인이 말했다.

 "나는 국민학교 졸업장이 전부다. 두 손으로 엿장수 가위를 치면서 고물상 하던 아버지 따라다닌 기억이 난다.

" 사업을 하다가 말아먹고, 1989년 정착한 안산 반월공단에서 시설 자동화 기사로 일했다.

마흔넷 먹은 사내는 삶이 팍팍할 때면 바다로 가서 망둥어 낚시를 했다.

 푸른 바다에서 원 없이 낚시를 즐기고 조개를 줍고 새를 관찰했다.

그가 말했다. "반월천 상류 쓰레기매립장에 갔더니 까마귀들이 썩은 음식 먹고 있더라. 저놈들이 언제 죽을까 싶어 매일 가봤다.

어허, 죽기는커녕…. 그러면 인간도 저런 원리로 환경오염 없이 살 수 있지 않을까 싶더라."

어느 날 갯벌에서 악취가 나더니 조개껍데기가 갯벌을 뒤덮었다.

연원을 좇아 바다 끝까지 가보니 대부도 산 하나가 사라지고 그 토석으로 방조제가 건설되고 있었다.

공단에서 나오는 폐수가 빠져나갈 구멍이 없이 갇혀 버렸고, 갯벌과 물고기와 물속 식물들도 함께 썩고 있었다.

20세기 말 대한민국을 혼돈으로 몰아넣은 시화호 사태가 시작되고 있었다.

나라에서 시행하는 초대규모 토목사업에 고물상 아들이 반기를 들었다.

최종인은 퇴근하면 시화호로 나갔다. 그가 말했다. "나를 위로해주던 바다가 지옥으로 변했다.

어찌 가만있을 수 있겠나." "먹고 살기도 바쁜데 왜 네가 이런 짓을 하냐"는 아버지 최달봉이 말리면 아들은 이리 대들었다.

"누가 하것소. 돈 가진 사람이 하것소? 내가 해야지."

폐수 방류, 썩은 바다, 죽은 물고기 떼와 갈매기 같은 우리가 알고 있는 시화호 사태 초기 사진들은 모두 그가 찍은 사진이다.

공청회에도 갔다.

"시화호 바다는 경제성이 없다"는 환경 평가 전문가에게

 "죽은 조개껍데기만 모아도 저 방조제를 만들 수 있다"고 사진을 내밀고 숫자를 내밀었다.


시화호의 사망 선고와 부활

1994년 1월 24일 12.7㎞에 달하는 물막이 공사가 완공됐다.

바다였던 시화 호수는 죽음의 땅으로 변했다. 물고기도 사라지고 물고기를 잡는 새들도 사라졌다.

포도밭과 배추밭은 말라붙은 갯벌에서 날아온 염분으로 초토화됐다. 1997년 여름 학자들은 시화호를 무생물대(無生物帶)로 선언했다.

'단 한 마리, 단 한 포기의 생명체도 발견되지 않는' 4000만 평짜리 지옥이 바다를 가르고 모습을 드러냈다.

 

최종인은 그 과정을 사진과 글로 꼼꼼히 기록해 언론에 알렸다.

개발업자와 주민들로부터는 '개발 방해자' 낙인이 찍혔다.

시민단체들이 움직였다. 시화호를 둘러싼 안산시와 화성시, 시흥시가 반대로 돌아섰다.

 정부는 그해 3월 방조제 갑문을 열어 바닷물을 끌어들였다.

언론은 최종인을 '시화호 지킴이'라고 불렀다.

1998년 7월 시화호 동쪽 섬에서 최종인은 딱새가 기어들어가는 붉은 바위 속에서 타원형 화석을 발견했다.

바위 생김도, 색깔도, 화석 생김도 희한했다. 최종인은 중생대 지층에서 공룡 화석이 나온다는 신문 기사가 떠올랐다.

그래서 학자들에게 답사를 요청했다. 결론은 공룡 알이었다.

 

아득한 옛날 육지였던 시화호 일대는 공룡들 집단 서식지임이 드러났다. 건

조한 갯벌 아래 무엇이 또 있을지 모를 일이었다. 2000년 3월 문화재청은 공룡 알 화석 발견 지역 480만평을 천연기념물 414호로 지정했다.

그해 12월 정부는 시화호를 막으려던 계획을 공식 포기했다. 땅으로 변했던 바다가 환생(還生)했다.

 

자연이 스스로 치유한 상처

바다였던 시화호가 호수로 변했고, 절반은 이제 땅이 되었다. 땅과 호수는 죽음의 공간이었다.

그 땅이 지금 전국 최대 규모 조류 서식지이자 생태학적으로 중요한 공간이 되었다.

노랑부리백로와 노랑부리저어새, 원앙, 황조롱이, 참매, 뜸부기, 수리부엉이 같은 천연기념물과 멸종 위기종이 흔하게 날아온다.

바닷물이 돌아온 호수에는 최종인 표현대로 "물 반 고기 반"이다.

소금기 먹고 사는 염생식물과 뭍에서 날아온 씨앗이 자란 육상식물이 공존한다.

세월이 가면서 염생식물에서 육상식물로 생태계가 바뀌는 모습도 관찰할 수 있다.

삵, 고라니 발자국과 사람 발자국이 공존한다.

군데군데 뿌리내린 나무들과 무성한 갈대와 띠풀이 만든 이국적인 풍경에 사람들이 몰려와 웨딩 사진을 찍고 작품 사진을 찍는다.

 아이들은 부모들과 함께 공룡 알을 구경하며 하루를 보낸다.

도무지 10년 전 죽음의 땅이라 불렸던 곳이라고는 믿을 수가 없다.

 공룡알을 발견한 이듬해인 1999년 최종인은 안산시 환경과 공무원으로 채용됐다.

짬짬이 하던 시화호 감시 작업이 직업이 됐다.

최종인이 말했다.

"새들이 돌아왔다. 모든 것이 돌아왔다는 뜻이다.

학자들이 30년이 걸린다고 했던 부활이 불과 10년 만에 이뤄졌다. 원칙은 너무나도 간단했다.

바다였던 땅을 바다에 돌려준 것뿐. 그다음은 다 자연이 스스로 치유했다."

땅의 사람들, 땅을 찾는 사람들

환갑을 맞은 2013년 최종인은 수리부엉이 둥지를 감시하다가 12m 절벽에서 추락했다.

목뼈가 부러지고 팔다리가 부러졌다.

새끼 두 마리가 하도 시끄럽게 울어대서 녹음기를 꺼냈는데, "손가락이 부러져서 버튼을 못 눌렀다"고 투덜댄다.

전문계약직으로 전환된 최종인은 더 바쁘다. 동물이 늘어난 만큼 밀렵꾼이 늘었다.

 

지난 3월 그 수리부엉이 둥지를 귀신같이 찾아내 나무들을 베어내고 플래시까지 터뜨리며

사진을 찍어간 생태사진가님도 감시 대상이다.

 

밤 근무는 다반사다.

"자살한 시신도 여러 구 수습했고 비 오는 밤에 호수를 수없이 돌아다녔다.

그런데 귀신은 없다. 정말이다. 한 번도 본 적도 만난 적도 없다.

었는데 무슨 혼이 돌아다녀."

 그 덕에 최종인은 귀신을 믿지 않게 되었다. 그가 말했다.

"나는 국민학교밖에 나오지 않았다. 공부 못 한 한은 자연에서 다 풀었다.

 이 광활한 땅을 봐라. 이게 보물이다."

 

 

텃밭 메던 호미를 던지며 윤수심이 말했다.

"떠날 데가 어딨어. 예서 살다 죽어야지.

근데, 옛날처럼 마을이 화목하들 못해." 굿당은 여전히 뒷산 꼭대기에 있다.

윤수심에 따르면 "노인들 열댓명이 그렇게 하지 말라고 데모를 했지만" 코앞에 전망대가 들어서서 각시당을 볼 수가 없다.

우음도 쪽 간척지는 개발이 진행 중이다.

말끔하게 깎아놓은 사료용 초원에 하수종말처리장 공사가 한창이다. 각시당 초소에는 사진가들이 새벽부터 나타난다.

땅은 역사다. 지난 세기 말 나라를 뒤죽박죽으로 만들었던 시화호 소동도 역사다.

 

그 역사 책 한 장(章)이 닫혔다. 이제 새로운 장에서 기록을 기다린다.

[출처] 본 기사는 조선닷컴에서 작성된 기사 입니다

 

 

 



 

 

 

 

 

 

 

 

 

 

 

 

 

 

 

 

 

 

 

 

 

 

 

 

 

 

 

 

 

 

 

 

 

 

 

 

 

 

 

 

 

 

 

 

 

 

 

 

 

 

 

 

 

 

 

 

 

 

 

 

 

 

 

 

 

 

 

 

 

 

 

 

 

 

 

 

 

 

 

 

 

 

 

 

 

 

 

 

 

 

 

 

 

 

 

 

 

 

 

 

 

 

 

 

 

 

 

 

 

 

 

 

 

 

 

 

 

 

 

 

 

 

 

 

 

 

 

 

 

 

 

 

 

 

 

 

 

 

 

 

 

 

 

 

 

 

 

 

 

 

 

 

 

 

 

 

 

 

 

 

 

 

 

 

 

 

 

 

 

 

 

 

 

 

 

 

 

 

 

 

 

 

 

 

 

 

 

 

 

 

 

 

 

 

 

 

 

 

 

우음도

<공룡알 화석지>

2015-05-22

 


 

김상조와 공미영이 눈으로본 세상

관리자
글 보관함
최근에 올라온 글
최근에 달린 댓글
방문자수
  • Total :
  • Today :
  • Yesterday :

김상조와 공미영이 눈으로본 세상